2010/08/21 16:32


맞딱드리게 되는 모든 상황에서 보이는 자연발생적이며 무의식적인 반응을 관찰하라. 무의식적인 반응들이야말로 재능을 보여주는 최고의 징표이다.

특히 인생의 어린시절에 느낀 열망은 재능일 가능성이 높다.

빠른 학습능력 또한 재능의 또 다른 징표다.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 마치 두뇌에 줄지어 있는 스위치들이 한번에 켜지는 것처럼 확 밝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만족은 재능의 마지막 단서이다. 가장 뛰어난 재능들은 사용할 수록 기분이 좋아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골라준 문장들.
내 사랑.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어흥:)
2010/01/05 23:54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속에 살아있는 보르헤스를 보았다. 호르헤 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보르헤스를 떠올렸고 주석과 호르헤의 말들, 아니 움베르트 에코의 인물설정 방식을 바라보며 단박에 보르헤스 임을 깨달았다. 움베르트 에코 또한 보르헤스를 사랑했던 것이다. 현재 등장인물들은 아프리카의 끝에서 만났다. 여남은 페이지를 읽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즐겁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것은 아비뇽으로 끌려간 그녀를 상징 하고 있을까? 다 읽고 생각해볼 일이다. 보르헤스를 설명해준 마법같은 에코의 텍스트들은 오랜만에 가슴을 뛰게 한다. 윌리엄 수도사는 마치 셜록홈즈 같은 느낌이다. 왜냐, 윌리엄의 고향은 영국이기 때문에. 어린수도사는 읽는사람의 이해를 돕는 즉 독자의 모습 혹은 글쓰는 에코본인 같은 느낌이다. 에코의 글을 읽으며(만약 읽었다면) 보르헤스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2010.01.06 다 읽은 후에,

장미의 이름 이라는 것은 지식의 상징은 아닐까,
한 개체가 있고, 그꽃은 한사람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이름이 생겼다. 장미.

지식은 신의 뜻에 의하여 원래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호르헤,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 주장하는 윌리엄
둘은 대립되어있지만 닮았다. 아드소는 공부를 시작하던 시절의 에코혹은 독자, 윌리엄은 글을 쓰던 당시의 에코
호르헤는 보르헤스의 일부이다. 내가 읽은 보르헤스의 생각 중 하나는 이야기는 원래부터 존재 했었다고 생각하고 했었는데 그점이 소설속 인물 호르헤와 진짜 보르헤스가비슷하다. 그러나 독일 진혼곡이나 유다에 관한 세가지 이야기들 같은 보르헤스 단편들을 생각해본다면, 에코는 보르헤스의 전부가 아닌 일부를 따 왔을 것이라고 본다. 혹은 에코는 보르헤스의 일부를 전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책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관련된 부분이 나오는데, 내가 보르헤스의 시중 포스팅 한 것의 제목 역시 시학이다. 그의 시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다.

시무시무한 거장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한 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세상에 읽을 책은 무한하다.


2010.01.17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니 장미는 그녀를 상징했을 가능성도 있다.
인트로의 장미, 엔딩의 꽃잎의 흩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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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9/12/24 16:19

이윽고 또 하나의 느낌이 서서히 나의 마음을 잠식해 왔고, 그것은 정말 끔찍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꼭>들어맞는 시간과 장소가 존재한다는 인식. 최악의 슬픔이 스러지고 사라진 과거와도 타협할 수 있게 된 이래, 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인간 위치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남은 여생을 기꺼이 보낼 결심을 하고, 내게 잠재된 가능성을 완전히 발휘하게 되는 곳은 이 우주의 어디, 그리고 <언제>일까? 내 과거는 죽었지만, 혹시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에서, 더 좋은 시절이, 앞으로 그 세계의 역사에 기록될 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의 황금 시대는 이곳이 아니라 하나 앞의 세계에 가로누워 있고, 또 이곳에서 내가 암흑 시대와 고투하고 있을 때, 단 한장의 티켓, 단 한 장의 비자, 단 한 장의 일기장 너머에 나 자신의 르네상스가 기다리지 않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내가 경험한 두 번째 절망이었다. 나는 <백조의 나라>에 오기 전까지는 그 대답을 모르고 있었다. 엘리너, 왜 당신을 사랑하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그것은 곧 나의 대답이 되었다. 비가 내린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로저 젤라즈니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의 단편 폭풍의 이 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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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9/12/09 00:39

우리가 한 작가의 초기 발전 과정을 어느 정도 알지 못하고서는 후일 그를 지배하게 되는 이런저런 동기들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적 제재들은 그가 어떤시대에 살았는가로 결정된다. 적어도 우리 시대처럼 소란스럽고 혁명적인 시대의 경우 이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뭔가를 쓰기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는 자기 특유의 어떤 정서적 태도를 획득해 놓고 있고 그렇게 획득된 태도로부터 아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기질을 길들이고 어떤 미숙한 단계나 괴팍한 기분에 매여 있지 않도록 자기를 훈련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작가의 할 일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초기 영향들로부터 아주 벗어난다는 것은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 자체를 죽이는 일이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외한다면, 나는 작가들이 글을 쓰게 되는 데는(산문 작가의 경우) 네가지 큰 동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동기들은 작가에 따라 그 각각의 정도가 다르고, 동일 작가의 경우에도 그가 사는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각개 동기의 비중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 네가지 동기란 이런 것이다.

1) 순전한 이기심.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망. 이게 작가의 동기, 그것도 강한 동기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작가는 이 특징적 동기를 과학자, 예술가, 정치가, 법률가, 군인, 성공한 사업가-말하자면 인류의 꼭대기 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공유한다. 인류의 대다수는 그리 격렬할 정도로 이기적이지는 않다. 대개 나이 서른쯤을 넘기면 사람들은 개인적 야심을 버리고 대체로 남을 위해 살거나 일상적 일에 짓눌려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에는 소수의 재능 있는 인간들, 끝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보려는 고집센 인간들이 있고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진지한 작가들은 대체로 저널리스트들보다 더한 허영과 자기 중심주의를 갖고 있다. 돈에 대한 관심은 덜 할지도 모르지만.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과 말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주는 영향을 인지하는 즐거움,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그래서 놓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떤 경험을 공유해 보려는 욕망. 이런 미학적 동기는 산문 작가들의 경우엔 대체로 미약한 편이지만 그러나 팸플릿 저자나 교과서 집필자까지도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어휘와 문구들을 갖고 있고, 이것들은 공리적 이유를 떠나 그를 매혹한다. 어떤 활자체를 쓰고 책의 여백은 어떤 크기로 할까 등의 고려도 그런 것이다. 철도 안내서의 수준을 넘는 책이라면, 어떤 책도 이 같은 미학적 관심을 아주 벗어날 수 없다.

3) 역사적 충동. 사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한 사실들을 발견하며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모아두려는 욕망.

4) 정치적 목적-<정치적>이란 용어는 이 경우 가능한 한 넓은 의미의 것이다.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이 여러가지 충동들이 어떻게 서로 싸우고, 사람과 시대에 따라 그 각각의 충동이 갖는 무게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성질상 나는 (여기서 <성질>이라 함은 처음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가 도달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동기들 가운데 1,2,3번 동기가 네번째 것을 족히 압도했을 그런 사람이다. 평화 시대였다면 나는 화려한 책 혹은 단순한 묘사 위주의 책을 썼을 것이 틀림없고 나의 정치적 충성이 어느 쪽에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태로 살았을 것이다.


-중략-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강하고 이기적이며 게으르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동기의 밑바닥에는 어떤 미스터리 하나가 놓여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마치 길고 고통스런 투병 과정처럼 끔찍하고 피곤한 작업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마귀에 씌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피곤한 작업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마귀는 어린 아기가 시선을 끌기 위해 소리를 내지를 때의 그 본능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개성을 끊임없이 지워 없애려 노력하지 않고서는 어떤 읽을만한 책도 쓸 수 없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도 같다. 내 경우 어떤 동기가 가장 강하게 작용했는지 확실히 말할 순 없지만, 그 여러 동기들 가운데 어느 것이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나는 안다. 내가 쓴 책들을 회고컨데,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일수록 나는 어김없이 생명력 없는 책들을 썼고 분홍색의 화려한 단락과 의미 없는 문장과 수식형용사들 속으로 속아넘어갔으며 그래서 대체로 허튼소리들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민음사 동물농장,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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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9/12/08 14:42

밤에 흠뻑 잠겨. 이따금 골똘히 생각하기 위하여 고개를 떨구듯 그렇게 흠뻑 밤에 잠겨 있음. 사방에는 사람들이 잠자고 있다. 그들이 집 안에서, 탄탄한 침대 속에서, 탄탄한 지붕 아래서, 요 위에서 몸을 쭉 뻗치거나 오그린 채, 홑청 속에서, 이불 밑에서 잠자고 있다는 조그만 연극 놀음, 순진무구한 자기기만. 사실은 그들이 언젠가 그때처럼 그리고 후일 황야에서처럼 함께 있는 것이다, 벌판의 막사, 헤아릴 수 없는 수효의사람들, 하나의 큰 무리, 한 민족이 차가운 하늘 밑 차가운 땅 위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이전에 서 있었던 곳에 이마는 팔에 박고 얼굴은 땅바닥을 향한 채 조용히 숨쉬며. 그런데 네가 깨어 있구나, 파수꾼이구나,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찾자고 곁의 섶나무더미에서 꺼낸 불타고 있는 장작을 휘두르는구나. 왜 너는 깨어 있는가? 한 사람은 깨어있어야 한다고 한다. 한사람은 있어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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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9/09/04 14:13


소설을 읽다보면 흥분시키는 책, 흥분시키는 작가가 있게 마련이다. 그 경우, 그런 작가, 그런 작품에 자신의 문학적 체질이 반응하고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작가의 작품을 섭렵함으로써 자신의 문학적 체질을 강화시켜나갈 일이다. 자신의 체질을 강화시켜줄 수 있는 작가를 만나는 것이 소설 습작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그 소설, 그 작가야말로 참된 문학적 스승이다. 아니 그이상의 스승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스승을 만난 다음에 할 일은 그 스승에게 배우는 것뿐이다. 그 스승이 참된 스승이라면, 일단 한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좋다. 반복적으로 읽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오진이 아니어야 한다. 만일 오진했다면, 엉뚱하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우고 있는 셈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훈수, 바둑 격언 가운데 이런게 있다. 정석을 익혀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바둑에서 정석이란 공격과 수비에 최선이라고 알려진 돌을 놓는 법을 일컫는 말이다. 바둑을 배우는 것은 정석을 익히는 과정이다. 정석을 익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정석에 얽매여서는 자기 바둑 세계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 이 격언 속에 들어 있다. 소설 공부도 마찬가지다. 정석을 익혀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갇혀서는 안 된다. 소설 문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그 문법의 틀에 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자기 세계를 펼쳐야 한다. 스승에게 배워야한다. 그러나 스승의 둥지를 벗어나 자기 날개로 날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이 내용도 잊어버려야 한다. 소설을 써야 한다.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승우-

보르헤스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어. 어느 일요일 오후 도서관에서 그의 책 중 하나를 잡았지.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였어. 한시간 삼십분만에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그 책을 사버렸지. 보르헤스 전집, 그가 추천한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어. 사실 아직 그가 추천한 책들을 사다놓고 다 읽은 것은 아니야, 왠지 손이 덜 가는 것도 있더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보르헤스의 글은 내 가슴을 뛰게 했어.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어주었지. 그리고 나는 정말 그를 스승님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는 거야.
나의 문학적 체질은 보르헤스 스승님 ㅋㅋ

마치 내 얘기를 적어 놓은 것 같아서 포스팅. 오늘도 즐거워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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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9/03/23 19:47
 결과적으로 우리들 각자는 하나가 둘로 나뉘어진 존재 즉 반편(半片)의 사람이어서, 그 모습이 마치 넙치 같다네. 그리하여 우리들 각각은 자기로부터 나뉘어져 나간 또 다른 반편을 끊임없이 찾게 되는 것이라네. 따라서 남자들 중에서 그 옛날에 자웅양성으로 불리었던 이러한 혼합적 존재가 반으로 나뉘어 남자가 된 사람들은 여자들을 매우 좋아하고 이종에서 많은 색광들이 나온다네. 마찬가지로 남자를 밝히고 간통죄를 저지르는 여자들도 이 종에서 주로 나온다네. 반면에 본래 순전히 여성적인 존재가 나뉘어져 반편이 된 여성들은 남자들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여성들에게 친근감을 느끼며, 이러한 부류로부터 레즈비언들이 생겨나는 법이라네. 마지막으로 순전히 남성적인 조재가 나뉘어져 반편이 된 남자들은 남자들만 따라다니기 마련인데, 그들은 소년 시절에는 진정한 남성의 축소형[각주:1] 같아서, 성인 남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동침하는 육체적 결합 속에서 즐거움을 찾기도 한다네. 이들이야말로 가장 남성자운 자들이기 때문에 청소년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불순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나 그 말은 틀린 것이네! 왜냐하면 그들은 불순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자기 확신과 용기 그리고 남성다움 때문에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 가장 커다란 증거는 그 같은 소년들만이 나중에 성장했을 때 국가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는 사실 속에서 찾아볼수 있다네.[각주:2]
 그들은 성인이 되었을때 자연스런 본성상 소년들을 사랑하고 결혼과 자식 낳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관습상 할 수 없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것이라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지 않고 그들끼리 서로 함께 살아가는 것도 충분히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네. 따라서 그 같은 사람들은 소년을 사랑하고 연인들을 아끼는 법이지. 마찬가지로 그들이 언제나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본래 자기 자신의 반쪽을 만나게 되는 경우에는, 소년애에 빠진 사람들뿐만아니라 어느누구라도 우정이나 친족감 또는 사랑과 같은 경이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그 상대방과 한순간도, 말로 표현하자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네. 그리고 그러한 감정 때문에 그들은 평생을 함께 살아도 상대방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로 표현 못한다네. 사실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그렇게 진지하게 함께 살기를 원하는 이유가 육체적 사랑의 기쁨을 공유하려는 목적에 있다고 믿지는 않을 걸세. 각자의 영혼이 원하는 것은 그러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은 분명하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단지 추측하여 상대방에게 어렴풋이 암시할 뿐이라네. 만약에 그들이 같은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그 옆에서 연장을 든 헤파이스토스[각주:3]가 다음과 같이 뭍는다고 생각해보게.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그렇게 함께 있으면서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대답을 못 해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 인간들에게 헤파이스토스가 다시 다음과 같이 묻는다고 생각해보게. '자네들이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으면서 정말로 원하는 것은 가능한 한 서로가 하나가 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렇다면, 나는 둘인 자네들을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즉 그대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각자가 모두 하나가 되어 살고, 죽음도 동시에 맞이하며 죽은 후에도 저 피안의 세계에서 하나로 살 수 있도록, 자네들을 녹인 다음[각주:4] 화로의 불을 함께 불어서 하나로 만들어주고자 하네. 그러니 자네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 그러한 운명과 마주했을때 자네들이 만족해할지 한번 살펴보게나.'
 이러한 말을 듣고서, 우리가 알기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그와는 다른 어떤 것을 원한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세. 오히려 각자 아무 주저 없이 그 옛날부터 원해왔던 것─즉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합하여 두 존재자가 하나로 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네. 그 상태야 말로 우리들의 원초적 본성은 하나이었고 우리들이 한 몸이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우리는 그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노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네. 반복하건대 확실히 전에는 우리가 하나였다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오만 때문에, 아르카디아인이 라케다이모니아인들에 의해 강제로 분산되어 살게 되었듯이[각주:5], 신에 의해서 분할된 것이라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신들에게 조신하게 굴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은 또 한번 반으로 나뉘어 주사위[각주:6]의 운명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라네! 그래서 우리는 에로스를 우리의 안내자 및 지도자로 삼아 불행한 일들을 피하고 좋은 일들만 만날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경건한 행동을 권고할 필요가 있다네. 즉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에로스를 거역하는 행위를 해선 안된다네!─그 신을 거역하는 사람은 모든 신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니까 ─ 사실 에로스와 친구가 되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과 다름없는 연인들과 사귈 수 있게 될걸세. 오늘날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말일세. 그런데 내가 방금한 말을 자네 에릭시마코스는 내가 파우사니아스와 아가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여 내 말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방금 말한 그러한 극소수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둘 다 모두 본성상 진정한 남자들인 것 같으니까 말일세.[각주:7] 적어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자든 여자든 간에 모든 사람들은, 사랑을 완수하고 각자가 자신과 다름없는연인을 만나 본래의 원초적 본성을 실현시키는 경우에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이라네. 따라서 그러한 사랑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면, 현실적 여건 속에서 그러한 상태에 가장 가까이 가는 것이 최선의 것임은 필연적이라네. 그런데 그러한 최선의 것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본성을 지닌 연인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네. 
 이러한 사랑이 신으로 인해 가능하다고 말하면 우리는 에로스를 올바르게 칭송하는 셈이 되는데, 그 이유는 이 신이 현재의 우리를 우리의 고유한 상태로 이끄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주고, 또 미래에 대한 가장 커다란 희망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라네. 또한 이 신은 신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우리에게 심어주고 우리의 원초적 본성을 되살리고 치료해줌으로써 우리를 완전히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라네."

향연 중 원시 상태의 인간들이 나눈 사랑의 여러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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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속에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흥미로운 정의가 들어있다. 
상대가 남자와 여자던, 여자와 여자던, 남자와 남자던말이지. 
소크라테스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의 말을 기록으로 남긴 플라톤 역시 대단한 사람이라고 본다.

자신과 다름 없는, 자신이 원하는 본성을 가진 연인을 만나 행복해 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타인의 사랑에 대해 본인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들을 공격하는 이가 적어지기를,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타이핑 하면서 다시보니 새롭고나. 
향연 포스팅 ① ②는
나의 부뚜막 고양이에게.
  1. '축소형'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테마키온temachion의 본래 의미는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의 작은 토막'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 이 당시 그리스에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권력과 명예 그리고 돈만을 추구하고, 갖은 술수를 동원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타락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사리사욕을 버리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 행위를 뜻한다. [본문으로]
  3. 헤파이스토스는 대장장이 신이다. 그의 연장은 망치이다. [본문으로]
  4. 플라톤이 장인(여기에서는 대장장이)의 작업(구리와 주석을 녹여 청동을 만드는 일)을 비유로 든 것은, 그것이 융합 상태의 가장 구체적인 이미지를 묘사해주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5. 그리스 시대의 관습에 따르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한테 점령을 당한 경우, 점령된 나라의 주민들은 점령국에 의해 여러 마을로 강제로 분산되어 살게 돤다. 이러한 관습은 디오이키스모스dioichismos라 불렀다. [본문으로]
  6. 리스파이lispai라는 주사위는 반으로 쪼개어져 주사위 놀이를 하는 사람에게 인식표로서 주어진다. 이렇게 주사위는 어떤 사람에게 귀속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미래의 불확실한 운명을 나타낼 때 '주사위 같은 운명'이란 비유적표현을 쓰게 된다. [본문으로]
  7. 이 대목은 파우사니아스의 아가톤에 대한 사랑을 암시하고 있다. 두 사람은 원초적 남성이 반으로 나뉘어 태어난 남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상보적 감정을 지니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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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9/03/23 18:16
 우선 자네들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고, 그 본성이 겪었던 것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라네. 사실 아주 먼 옛날에 우리의 본성은 오늘날 인간의 본성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네. 첫째로 인간은 오늘날처럼 남성과 여성의 양성이 아니라 세 종류로 나뉘어 있었음을 알아야 하네. 그런데 이 세번째 종류의 인간은 남성과 여성 모두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지만 그 실재 자체는 사라졌다네. 사실 자웅동성[각주:1]은 그 옛날에는 하나의 독립된 종이었으며, 형태상으로나 이름상으로 모두 남성과 여성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네. 어쨌든 그 종은 오늘날에는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고, 단지 그 명칭만 특정의 사람을 비난할 때 쓰이고 있다네. 두번째로 알아야할 것은 이 종이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어, 둥그런 등과 원형의 옆구리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라네. 그들은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다리를 지니고 있고 완벽하게 등그런 목 바로 위에 완전히 서로 똑같은 두 개의 얼굴이 반대로 놓여 있고 그 위에 하나의 머리가 붙어 있다네. 그들의 귀는 네개이고 수치스러운 부분도 두 개인데,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로부터 상상할 수 있을 것이네. 걸음걸이를 보자면, 그들은 지금처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이면 어디로든지 똑바르게 갈 수도 있고, 빨리 달려가고 싶을 때에는 마치 지상 회전을 하는 사람들처럼 다리를 원모양으로 회전하며 앞으로 곧장 갈 수도 있다네. 이때 그들은 여덟 개의 사지를 지지점으로 이용하여 수레바퀴 모양이 되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쓴다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 이유로 세 종으로 나뉘어졌고, 또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졌겠는가? 사실 남성은 본래 태양의 자식이고 여성은 지구의 자식이며, 그 두 종의 성질을 모두 지닌 이 세번째 종은 달의 자식인데, 그 이유는 달이 그 두 행성에 모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그리고 그들의 형태가 동그랗고 그들의 걸음걸이 또한 원형을 띠고 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조상들과 닮았기 때문이라네. 그리하여 그들은 대단한 힘과 능력 그리고 오만함까지 지녀서 신들을 공격할 정도였다네. 호메로스가 에피알토스와 오토스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던 것[각주:2], 즉 하늘을 침범하려고 했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실은 그 당시의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라네. 사실 그 당시의 인간들은 신들에게 대들었으니까 말일세!
그런데 제우스와 그 밖의 여러 신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숙고해봤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서 매우 당황했었다네. 사실 신들은 인간들을 죽일 수도, 거인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벼락을 쳐서 멸종시킬 수도 없었고─그리할 경우 신들은 인간들이 바치는 제사와 공물을 받아먹을 수가 없게 되 것이니까 말일세─,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방종을 참을 수도 없었다네. 제우스는 한참 고민한 끝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네!
'나는 인간들이 지금보다 약해져서 더 이상 오만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노라! 이제 나는 인간들 각각을 둘로 나누겠다. 그러면 인간들은 더 약해질 것이고 또한 동시에 그 숫자가 증가함으로 인해서 우리 신들에게는 더 유익하게 될 것이니라. 그리하여 인간들이 두 다리로 똑바로 서서 걸어다니게 만들겠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인간들이 또 불손하게 굴고 소요를 일으키려 할 때에는, 나는 그들을 다시 둘로 나누어서 외발로 뛰어 다닐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노라.'

이렇게 말하면서 제우스는 마치 저장 식품을 만들기 위해 마가목 열매를 자르는 사람처럼 또는 달걀을 말총으로 자르는 사람처럼 인간들을 둘로 잘랐다네. 제우스는 아폴론에게 이렇게 나뉜 사람들의 얼굴과 목의 반쪽을 잘려나간 돌려놓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은 인간이 항상 자신의 잘린 단면을 보면서 좀더 분별력을 지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네. 그리고 제우스는 잘린 다른 부분들도 치료하도록 아폴론에게 명령했었다네.[각주:3] 그리하여 아폴론은 사람의 얼굴을 돌려놓고 온 신체의 피부를 오늘날 배로 불리는 부분으로 당겨서, 마치 염낭을 묶듯이, 배 중앙에 하나의 주둥이가 만드어지도록 단단히 묶었다네. 이 주둥이가 바로 우리가 배꼽이라 부르는 부분이라네. 그리고 주름의 대부분을 펼쳐서 가슴에 붙여주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는 가파치가 나무로 된 목형위에 가죽을 올려놓고 펴듯이 그와 비슷한 도구를 사용하였다네. 그때 아폴론은 배꼽 주위에 약간의 주름을 남겨놓았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예전의 자기 상태에 대한 기억을 가질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네. 이렇게 인간의 본래 상태가 둘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그 나뉘어진 각각은 자기 자신의 또다른 반쪽을 갈망하면서 그것과의 합일을 원하게 되었다네. 그래서 그들은 팔로 상대방을 껴안고 서로 얼싸안으며 한 몸이 되기를 원하고, 상대방 없이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아서 굶주림 또는 무기력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네. 그리하여 그 반쪽들 중에서 하나가 죽고 다른 하나가 살아남게 될 때마다, 그 살아남은 반쪽은 다른 상대방을 찾아서 그 상대방과 결합을 하려고 드는데, 그 상대방이 순전한 여성[각주:4]의 반쪽이든─오늘날 우리가 여성이라고 부르는바─순전한 남성의 반쪽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 종은 사라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네. 사실 그때까지는 그 수치스러운 부분들이 밖에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상대방 몸속에 생식을 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매미처럼 땅속에 생식을 하여 아이를 낳아왔다네. 그래서 제우스는 인간의 수치스러운 그 부분들을 앞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인간들이 생식 기관들을 이용하여, 즉 남성의 그것을 여성의 그것 속에 삽입함으로써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네. 즉 남성과 여성이 만날 경우에는 그 결합을 통해 아이를 낳음으로써 종의 재생산이 일어나도록 하고, 남성과 남성이 만날 경우에는 그 결합으로부터 서로 함께 있음에 대한 포만감에 질려 그 자체를 중단하고 오히려 어떤 보람된 행위를 향하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에 전념하도록 만들어주려는 데 있었지. 그러므로 인간들 서로에 대한 사랑은 그 먼 옛날부터 인간의 본성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인간의 원초적 본성을 결합시켜주는 역할을 해왔으며, 둘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작업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치료해왔다고 볼 수 있다네.


향연(문학과지성사) 중 인간에 관한 환상적인 이야기

  1. '자웅동성 androgynon'은 '남성andron'과 '여성gynon'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본문으로]
  2. 형제간이었던 이 두 거인은 하늘로 올라가기 위하여 올림포스 산에 오싸Ossa 산을 쌓고, 그 위에 다시 펠리온Pelion 산을 쌓았다. [본문으로]
  3. 아폴론에게 이러한 업무가 주어진 것은 그가 치료의 신(크라틸로스)이었기 때문이다. '나쁜 것들을 쫓아버리는 자, 도와주는자'는 아폴론의 여러 별명 가운데 하나이다. [본문으로]
  4. 남성ㆍ여성이 합쳐진 것이 아닌 순전히 여성성만으로 전체가 이루어진 여성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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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9/03/02 08:08





러스킨은 사람들이 세부 사항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했다. 그는 근대의 여행자들, 특히 기차를 타고 일주일에 유럽을 다 둘러본다고 [ 토머스 쿡 Thomas Cook(1808~1892, 영국의 침례교 전도사. 금주 캠페인 집회에 많은 사람들을 참석시키려고 단체 유료여행을 주선한 것이 유럽 단체 여행 개발의 시초가 되었다)]이 1862년에 처음 제공한 여행일정이다 ] 자랑하는 사람들의 맹목과 성급을 개탄했다. " 한군데 가만히 앉아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린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튼튼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총알에게는 빨리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에게는-그가 진정한 사람이라면-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만에 워낙 익숙해 있기 때문에, 만일 어떤 사람이 한 장소에서 발을 멈추고 데생을 하는 데 필요한 시간 동안 그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면 유별나다고, 어쩌면 위험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무 한 그루를 그리는 데는 적어도 10분간의 예리한 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예쁜 나무라 하더라도 행인을 1분 이상 잡아둘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러스킨은 빨리, 그리고 멀리 여행하고 싶어하는 소망이 한곳에서 제대로 된 기쁨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즉 바구니 가장자리에 걸린 파슬리의 작은 가지 하나처럼 세밀한데서 기쁨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864년 맨체스터에서 부유한 산업가들을 청중으로 앉혀놓고 열변을 토하다가 관광 산업에 대한 분노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 여러분은 기차를 타고 달리는 것도 기쁨의 하나라고 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샤펜하우젠 폭포 위에 철교를 세워놓았습니다. 여러분은 루체른 절벽에 있는 텔의 예배당 옆에 터널을 뚫었습니다. 여러분은 제네바 호수의 클라렌스 호숫가를 파괴했습니다. 영국에는 여러분이 으르렁거리는 불덩어리를 채워 넣지 않는 고요한 골짜기가 하나도 없으며, 외국도시도 여러분이 뻗어나가는 곳에는 사람을 잠식하는 하얀 나병 같은 호텔이 들어서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알프스 산맥도 곰 사육장에서 곰들이 오르내리는 비누 기둥으로 여깁니다. 여러분은 그곳을 올라갔다가 다시 미끄러져 내려오며 '기쁨의 비명'을 질러댑니다."

말투는 신경질적이지만, 고민은 진짜다. 테크놀로지는 아름다움에 쉽게 다가가게 해줄지 모르지만, 그것을 소유하거나 감상하는 과정을 간단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사진은 무엇이 문제인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러스킨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끔찍한 19세기가 인간에게 쏟아 부은 모든 기계적인 독 가운데 그래도 그것은 한가지 해독제를 제공했습니다." 이것은 러스킨이 1839년에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1787~1851 사진을 발명한 프랑스인)의 발명품에 대해서 한 이야기이다. 러스킨은 1845년에 베네치아에서 은판 사진을 여러 장 만들어보고 그 결과에 기뻐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선명한 햇빛으로 만든 이 은판 사진은 아주 화려합니다. 궁전 자체를 들고 가는 것과 거의 같아요. 돌 조각 하나, 얼룩 하나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비례에 대해서도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진이 그것을 찍는 사람들 다수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의 열의는 사그라졌다. 사람들은 적극적이며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데생에 대한 애착을 설명하면서[그는 어디를 가든 무엇인가를 스케치했다], 그러한 애착이 "명성이나 다른 사람들 또는 나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하는" 욕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과 비슷한 어떤 본능" 에서 생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세 가지 행동의 공통점은 모두 자아가 세상의 바람직한 요소를 동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바깥의 선善을 안으로 옮기는 것이다. 러스킨은 어린 시절에 풀의 생김새가 너무 좋아 자주 그것을 먹고 싶었지만, 점차 그것을 그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풀밭에 누워 자라는 풀잎을 그리곤 했다. 초원의 구석구석, 또는 이끼낀 강둑이 나의 소유가 될 때까지."[강조는 필자]

사진만으로는 그렇게 먹는 것을 보장할 수 없었고, 지금도 보장할 수 없다. 풍경의 진정한 소유는 그 요소들을 살피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에 달려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름다움이 기억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 카메라는 보는 것과 살피는 것 사이의 구별, 보는 것과 소유하는 것 사이의 구별을 흐려버린다. 카메라는 진정한 지식을 선택할 기회를 줄 수도 있지만 어느새 그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을 잉여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카메라는 사진을 찍음으로써 우리 할 일을 다 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장소-예를 들어 숲-를 제대로 먹으려면 '줄기와 뿌리와 어떻게 연결될까?' '안개는 어디서 올까?' '이 나무는 왜 저 나무보다 색이 짙을까?' 등의 문제를 계속 제기하게 된다. 스케치를 하는 과정에서는 은연중에 이런 질문을 하고 또 답을 찾게 된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중 아름다움의 소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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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하는 이라면 여행의 기술 꼭 읽어보시길.


하나씩 타이핑 하면서 다시 읽어봐도 역시 좋다. 
내게 와락 하고 다가왔다. 존러스킨이, 그의 생각이, 그를 추천한 알랭드보통이


여행의 기술을 추천한 것은 인도여행 중 다르질링에서 만난 신영이였다.
고마워, 신영아 덕분에 좋은 책 잘 읽었다.

여행의 기술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여행지에서도, 집에 돌아오고나서도
어느타이밍에나 읽어봐도 좋은 책일것 같다.
역시나 알랭드보통횽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이책은 여행에 대하여 출발,동기,풍경,예술,귀환 크게 다섯가지 분류로 나눈뒤
장소와 그를 그곳으로 안내한 안내자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사실 그부분에 대해서는 나와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다. 나를 인도로 안내한 것은 류시화였다.)

출발과 동기 부분에서 나오는 보들레르와 워즈워스에 대한 이야기도 참 좋았고
예술에 대한 부분에서는 존 러스킨과 빈센트 반고흐 부분은 그냥 빠져들었다.
공교롭게도 나와 오빠는 내가 3년전 구입한 별이 빛나는 밤에 2000조각짜리 퍼즐을 맞추는 중이다.
(3년동안 포기했는데 오빠가 다시 해보자고 해서 하는중이다)
가장 힘든 부분인 나무를 맞추는 오빠에게 힘이 되어주는 문구가 여럿 있었다. 
그나무의 이름이 사이프러스라는 것도 여행의 기술 덕분에 알았다.
참, 타이밍 절묘하기도 하네. 


저렴하게 구입했는데, 책값 본전 뽑고도 남았다. 아니 뭔가 더 지불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Posted by 어흥:)
2008/11/13 23:18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땐 인간이 지상의,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겠지. 굉장한 일이야!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간이 선행을 실천하는 존재가 되겠어? 그게문제지! 나는 언제나 그 생각을 하고있어. 그렇다면 인간은 누구를 사랑하게 될까? 누구에게 감사를 드리며, 누구를 찬송하게 될까? 라끼찐 녀석은 웃고 있었지. 인류는 하느님 없이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거야. 그런 돼먹지 못한 애늙은이나 그런 주장을 펼 수 있겠지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라끼찐한테 인생이란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야. <당신은 인간의 시민권 신장을 위해서나 쇠고기 값이 오르지 않도록 활동하는 편이 더 나을 거요.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그 편이 철학보다 더 손쉽고 가까운 길이니까>라고 오늘 나한테 말하더군. 그말에 대해 나도 이렇게 쏘아붙였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넨 자기 이익을 위해 쇠고기 값을 올릴테지, 그래서 1꼬뻬이까로 1루블은 벌어들이겠지>라고 말이야. 그러자 화를 벌컥 내더군. 그런데 선행이란 대체 뭘까? 나한테 대답해 줄 수 있겠니, 알렉세이? 나한테 이런 선행이 있다면, 중국 사람한테는 다른 선행이 있겠지. 그러니 상대적인 것이잖아. 그렇지 않니? 아니면, 절대적인 것일까? 정말 어려운 문제야! 내가 이 문제 때문에 이틀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비웃지는 않겠지 요즘 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어. 정말 무상한 일이야! 이반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있어. 그애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거야. 나와는 차원이 다르지. 하지만 그 애는 침묵을 지키고 있어. 내 생각에 그애는 비밀 공제 조합원 같아. 내가 질문을 던졌는데도 입을 꼭 다물고 있더군. 그애가 가진 지혜의 샘물을 얻어 마시고 싶었는데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거야. 꼭 한 번 한마디 내뱉은 적이 있었을 뿐이지.


도스또예프스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중 미짜가 알료사에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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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인물심리 묘사 쩐다. 하권 중반쯤 읽는데 뭐 이런 괴물작가 있나 싶다. 미치지않고서야, 아니 신이 아닌 이상 이렇게 인물심리를 묘사하는 작가가 어느시대, 어느나라에 있단 말이냐. 번역으로 보는 나도 이런데, 모국어로 저런 책을 읽고 느낀다면 장난아니겠구나. 러시아민족이여 그대들의 축복이다 축복!
내게는 죄와벌 보다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 훨씬 크게 다가온다.  죄와벌은 어떠한 의무감을 가지고 읽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내용이 별로 없다. 이런 작가라면, 죄와벌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죄와벌은 사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빌렸는데.. 순위가 바뀌었구나.
도소토옙스키 전집 소장목록 추가다.

대박.
Posted by 어흥:)
2008/10/24 01:23




죽음이나 이별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이야.
잘해주든 못해주든.. 한 번 떠나버린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슬픈거야 ....


                                                               - <아홉살 인생> 위기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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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16

정답이야, 그게 바로 슬픈 이유야







Posted by 어흥:)
2008/10/16 23:39



당신이 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 거기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이 있다. 하늘은 빛나는 별들로 넘치고 서늘한 공기가 있으며 그리고 당신이 있다. 즉 관찰자이고 경험자이고 사고자이며 활동하는 심장을 갖고 있는 당신, 중심이며 공간을 만들어내는 당신이 있다. 당신은 당신과 별들 사이의 거리(공간), 당신과 아내, 남편 또는 친구 사이의 거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지 없이 무엇인가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또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이 모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신은 그것에 관해 말하고 그것에 관해 쓰지만, 드물게 완전히 자기 포기할 때를 제외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안 적이 없을 것이다. 그것 주위에 공간을 만들어내는 중심이 있는 한, 거기엔 사랑도 아름다움도 없다. 아무 중심도 아무 주위도 없을 때 사랑이 있고, 당신이 사랑할 때 당신이 아름다움이다.

 

상대편의 얼굴을 볼 때 당신은 중심에서 보고 있는 것이며, 그 중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내어 우리의 삶이 이다지도 공허하고 무감각한 것이다. 당신은 사랑이나 아름다움을 경작할 수 없고 진리를 만들어낼 수도 없지만, 만일 항상 자신이 하고 있는 바를 안다면, 당신은 앎을 경작할 수 있으며 그 앎으로 인해 쾌락,욕망,슬픔,완전한 고독, 인간의 권태의 본질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거리(공간)'라고 불리는 것과 만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이 바라보는 것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 거기엔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당신이 세계를 개혁하려 하거나 새로운 사회 질서를 가져오려고 해도 또는 아무리 당신이 개선에 관해 말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당신은 단지 심한 괴로움만 만들어낼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지도자도 없고 선생도 없으며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은 이 광적으로 잔인한 세계에 홀로 서 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중 앎에 대한 부분.

Posted by 어흥:)
2008/10/16 23:35





모든 길은 진리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리는 길을 갖고 있지 않으며, 바로 그 점이 진리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진리는 살아 있다. 죽은 것은 그것이 정적(靜的)이기 때문에 길을 갖고 있지만,
진리란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서 쉴 곳이 없다.
어떤 절이나 교회에도 없으며 어느 종교나 선생, 철학자 그 누구도
당신을 진리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되면,
 당신은 이 살아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Posted by 어흥:)
2008/10/15 23:39






개인의 역사는 어린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전에는 제 3자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된다.
유년을 극복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내레이터 노릇을 해온 부모의 그릇된 이야기를 교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에 대항하는 투쟁은 유년에 끝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우리가 누군가라는 문제의 결정을 놓고 선전전이 벌어진다. 현실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수많은 이해 집단이 투쟁을 한다. 그러나 현실은 계속 왜곡되어 있다. 적의 질투 때문일 수도 있고, 무관심한 사람의 나태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맹목성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도 엄청난 선입관이 따른다. 별 근거도 없이, 진정한 이해에 요구되는 중립적 자세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서, 어떤사람이 천재 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결정을 내린다. 기분 좋은 왜곡이지만, 어쨌든 왜곡은 왜곡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서 우리 자신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유원지의 요술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아주 작은 사람이 갑자기 3미터 길이로 늘어나기도 하고, 마른 여자가 뚱뚱해지기도 하고, 뚱뚱한 사람이 날씬해지기도 하고, 기린 같은 목이나 코끼리 같은 발이 생기기도 하고, 나쁜 인물이 되기도 하고 성자가 되기도 하고, 뇌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길고 아름다운 다리가 생기기도 하고 다리가 없어지기도 한다.

나르시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촉촉한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약간은 실망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떤 눈도 우리의 나를 완전히 담을 수는 없다. 우리가운데 어느부분은 절단당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치명상이던 아니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中>

Posted by 어흥:)
2008/10/12 23:40



책의 의미는 읽는사람 마음대로다.
같은 책을 읽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같은 사람이 같은 책을 봐도
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다.

따라서 원래부터 좋은 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좋은 책이 좋은 사람을 만들지도 않는다.

좋은 책은 좋은 당신이 그렇게 읽을 때에만 존재하는,
그러니까 당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책에서 성자의 말을 읽어냈다면
그것은 당신 마음속에 성자가 앉아 있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이 좋은 책을 발견 하지 못하고 있다면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의심해볼 일이다.

 

-막시무스의 지구에서 인간으로 유쾌하게 사는법중에서 독서

Posted by 어흥:)
2008/10/08 21:57




장-마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꼬냑 병과 술잔 두개를 가지러 갔다. 한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 그는 내가 열여섯 살 적에 했었을 말을 상기시켜 주었어. 그 순간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맺고 있는 우정의 유일한 의미를 깨달았어.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용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야.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며 이 물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인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야.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우리가 자아를 비춰볼 수 있도록 그들이 이따금 거울의 윤을 내주는 것일 뿐이야.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때 무슨 짓을 했건 알게 뭐야! 내 어린 시절부터, 아마도 유년기부터 내가 항상 갈구했던 것은 전혀 다른 것이야. 그것은 모든 다른 가치보다도 위에 놓인 우정이지. 진실과 친구 사이에서 나는 항상 친구를 택했노라고 즐겨 말했었어. 도발삼아 말하곤 했지만 그것이 나의 진심이기도 했지. 지금은 그런 격언이 케케묵었음을 나도 알아. 파트로클레스의 친구인 아킬레스나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나 심지어 주인과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진정한 친구였던 산초에게나 통할 말이지. 그러나 우리에겐 더이상 통하지 않아. 내 비관주의가 너무도 심화되어 지금은 우정보다 진실을 택할거야.」

「 우정은 내게 있어서 이데올로기, 종교, 국가보다도 더욱 강한 뭔가가 존재한다는 증거였어. 뒤마의 소설에서 네명의 친구는 종종 적대 진영에 가입해서 어쩔 수 없이 싸워야만 했지. 그러나 그 때문에 우정이 변질 되진 않았어. 그들은 각자 진영의 진실을 비웃으며 꾀를 내어 은밀히 서로를 도와왔지. 그들은 진실, 명분, 상관의 명령, 왕, 왕비 그리고 다른 모든 것보다도 우정을 앞세웠어 」

샹탈은 그의 손을 쓰다듬었고 그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야기 했다.

「뒤마는 삼총사의 이야기를 이백 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썼어. 우정을 상실한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이미 그때부터 있었던 걸까? 아니면 우정의 실종은 보다 최근 현상일까?」

「 저는 대답할 수 없어요. 우정이란 남자들의 문제에요. 그건 그들의 낭만주의죠. 우리의 것은 아니죠. 」


「 우정이 어떻게 생기는 걸까? 필경 적대자에 대한 하나의 연대감, 그것이 없다면 그의 적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연대 같은 것일 거야. 아마도 이제는 이러한 연대가 더이상 필요없는지도 모르지 」

「 적이란 항상 있게 마련인데요 」

「 맞아 하지만 그 적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이름도 없어. 관료 조직, 법률 같은거야. 당신 창문 앞에 누가 공항을 건설한다고 결정하거나 혹은 당신이 파면을 당했을 때 당신 친구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겠어? 누군가 당신을 돕는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누구, 즉 사회 연대기구, 소비자 보호 연맹, 변호사 사무실 같은 거지. 어떤 시련으로도 더 이상 우정을 확인할 길이 없어.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친구를 찾아나서거나 도적떼로부터 친구를 구하기 위해 칼을 뽑는 것과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거야. 우리는 큰 위험이 없는, 그러니까 우정도 없는 삶을 헤쳐가는거야. 」

「 그게 사실이라면 F와 화해 할 수 있겠군요. 」

「 내가 그를 비난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더라도 그는 왜 비난하는지 몰랐을 거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 때 그는 침묵했어, 그런데 문제는 내가 정당해야만 했어. 그는 자신의 침묵을 용기라고 생각했어. 심지어 그는 나에게 가해지는 집단적 박해에 끼여들지 않았다고 나에게 누가 될 어떤말도 하지 않았다고 자랑까지 했다더군, 그래서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고 내가 그를 아무 말 없이 만나지 않자 상처를 받았을 거야. 그에게 중립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이 내 잘못이었어. 그가 악의에 차고 흉악한 분위기 속에서 어줍잖게 나를 변호하려 들었다면 그 자신도 따돌림, 갈등, 어려움을 겪었을 거야. 내가 어떻게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겠어. 더구나 그는 내 친구였는데! 다른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예의에 벗어나는 짓이지. 왜냐하면 과거의 알맹이가 빠져버린 우정은 오늘날에는 상호존중의 계약, 한마디로 예절계약으로 변질되었어. 그러니 친구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것을 부탁하는 것은 결례가 되는거야 」

「 물론이죠. 하지만 그런말을 하는 당신도 씁쓸해 하진 말아야죠. 빈정거리지도 말고요. 」

「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진 않았어. 그냥 그렇다는 말이야. 」

「 만약 당신이 증오의 대상이 되고 누명을 쓰고 사람들의 먹이가 된다면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두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뜯어먹으려는부류에 합류하러 갈 것이고 다른 쪽은 점잖게 못 들은 척할 거에요. 물론 당신은 그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을 거에요. 점잖고 조심스러운 이러한 두번째 범주가 당신의 친구에요. 현대적 의미에서만 친구죠. 장-마르크, 이런 사실을 나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


밀란쿤데라의 정체성 중에서
F의 죽음 후 장마르크와 샹탈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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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까지도 장-마르크와 거의 흡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
우정에 대한 신념 비슷한 것을.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보니 알겠더라고.
샹탈의 정의가 맞는거지. 그건 낭만주의에 지나지 않아.
예외는 늘 존재하니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샹탈이 맞아.
낭만주의 속에서 허우적 대던걸 누굴 탓해. 내탓이지.
다만 허우적 대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
참 많이 힘들었거든.

우정을 상실한 세계에서 '장마르크식'의 노스텔지어는
아주 오래전 부터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

'아주 오래전 부터 있었을 꺼야'
라고 대답할래.


200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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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8/10/08 21:55





詩의 천분은
어떤 놀라운 관념으로
우리를 현혹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존재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는 데 있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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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8/10/08 21:53






소크라테스에 대해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마흔 아홉 살이 될 때까지 해병대의 중무장 보병으로 조국에 봉사하고, 쉰 살이 되어 크샨티페를 아내로 얻은 뒤에야 시장이나 광장 같은 데서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사실 입니다. 그의 목표는 두 가지 였습니다. 하나는, 인간은 마땅히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바깥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둘은, 개개인의 덕목인 이 실천적 능력으로써 시민의 도덕의식 개혁에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그는 산파, 즉 아기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람들을 가르친 교수법도 '산파술' 혹은 '조산술'로 불립니다. 산파는 임산부가 아기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지, 씨를 뿌리는 사람도 직접 낳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제자가 모르고 있던 새로운 지식을 주입시키는 대신 제자와의 '대화'를 통하여 그 제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삼아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인식에 이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대화'와 '산파술'은 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두개의 열쇳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이해에 필요한 또하나의 열쇳말이 있습니다. '다이몬'입니다. '데몬(demon:악령)'이라는 현대 영어에 그대로 남아 있는 '다이몬'은 내부에서 들리는 비판적인 양심의 음성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화에 나오는 황당무계한 신들의 신탁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지를 인식하고 내부에서 들리는 비판적인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법정에 기소한 자들에게 '다이몬'은 '악령의 소리'였습니다. "신들에 대한 믿음을 방기하고 다이몬에 대한 믿음을 부추겼다." , 반대파들이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죄목중의 하나가 이것이었지요.

이윤기, 그리스에 길을 묻다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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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8/10/08 21:52






글리파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부산 출신 여장부 '리자 킴' 사장은, 그리스 신화와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해 아는 척하는 나에게 이러더군요.

"이 선생님은 그리스인들보다 그리스를 더 잘 알고 계시는 군요. 20년동안이나 살아봐서 아는데요.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은 고대 그리스를 전혀 몰라요. 저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가 소크라테스의 잠언인 줄도 몰라요. 직원 여섯명에게 물어보았는데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에이, 설마, 했지만 김사장 말이 맞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고도 경주를 잘 알지 못하고 현철 퇴계선생에 둔감하듯이 그리스인들도 아테네와 소크라테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 사장이 만일에 이로써,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은 고대 그르스에 대해 무지하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부당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우리가 오해하고 있을 뿐, 소크라테스가 처음으로 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리스 중부의 고대 도시 델포이에 있는, 예언의 신 아폴론의 신전 박공에 새겨져 있던 경구 입니다. 이 경구의 원조는 고대 그리스의 칠현중 한 분인 탈레스 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 인들이 칠현에게, 후세의 인류에게 귀감이 될 만한 말 한마디씩을 들려주면 아폴론 신전에다 새기겠다고 했을 때 탈레스가 했다는 한마디가 바로 '너 자신을 알라'였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가 소크라테스의 잠언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가, 200년 전에 발화 된 이 한마디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깨달음으로써 그 자신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봅니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이 이름이 긴긴 세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입을 오르내린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가?"

철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은, '너 자신을 알라'와 함께 소크라테스가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악법도 법이다."

"결혼?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


자신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깨닫고 부끄러워 하는 독자가 있다고 해도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그는 이런말도 남겨 두었거든요.

"나는 현명하다. 왜? 원래 무식했지만 한 가지를 알게 되었거든. 내가 무식하다는 것, 이것을 알고 있으니 나는 현명한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먼저 '너 자신을 알라'




이윤기, 그리스에 길을 묻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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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
2008/10/08 21:50






우리가 최상의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절반의 진리에 불과하다.

어떤진리에도 머물지 말라.
그것을 다만 한여름밤을 지낼 천막으로 여기고
그곳에 집을 짓지 말라.
왜냐하면 그 집이 당신의 무덤이 될 테니까.

그 진리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할 때
그 진리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히 여기라.

그것은 침구를 거두어 떠나라는
신의 속삭임이니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중에서

진리에 대하여 -벨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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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흥:)